<부인의 폐경>
2007. 7. 20. 23:34ㆍ사소한 이야기들/잡동사니
<부인의 폐경> 제목으로 어느 여행사이트 게시판에 있던 글인데 전문을 옮겨 봅니다.
마땅히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인이라는 호칭은 부르는 저에게도 어색함으로 다가오지만 달리 부를 수있는 이름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나 부인이나 지난 16년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호칭을 생략했었습니다.
서로를 알아왔던 그 긴 세월에 비해 만남의 횟수는 고작 열 번도 채 되지 않았었기에 부르는 호칭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특별하게 불편함을 갖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화요일, 3년 만에 만나 저녁을 함께 한 자리에서 저는 부인과의 첫 만남이 1991년이었다는 것을, 그때 제 나이가 스물 일곱이었으며 부인의 나이가 마흔 한살이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알았습니다.
지나간 숫자를 꺼내놓는 부인은, 안개와 같은 망설임이라곤 조금도 없는 선명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어제의 일인 것과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랬지요. 스물일곱이면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지는 지금이지만, 분명히 그때 저는 갓 대학을 졸업한 여행인솔자로, 부인은 여행자로 16년의 처음을 시작했습니다. 괌이었었고, 열 대여섯명의 일행이 함께했고, 부인은 초로의 남편분과 함께 여행을 오셨었지요.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16년 전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 여행이 끝난 후, 부인은 1년에 한 번 정도씩 저에게 전화를 주셨었지요. 다음 여행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는 부인에게 저는 이런저런 여행을 추천했었고 여행을 다녀오신 부인은 저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도 하셨습니다. 대접이라는 말에 한없이 어색해하면서도 저는 부인과 2년에 한 번은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여행의 현장을 잠시 떠나있을 때에도, 부인은 해가 바뀌면 행하는 의식처럼 여행을 용건으로 전화를 주셨었지요. 그리고 드문드문 남편분의 정년퇴직이야기, 아이들의 대학진로이야기, 또 그 아이들의 취업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렇게 마흔 한 살의 부인은 시흔 일곱이 되셨고, 스물일곱의 청년은 마흔 세 살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만남의 횟수가 적다고 해도, 16년이라는 세월은 한참 손아래 동생뻘 되는 사람에게 조금은 스스럼없고 격의 없게 대할 수있으련만 부인은 그러지 않으셨지요.
언제나 제게 조심스러우셨고, 흐트러짐이 없으셨습니다. 또한, 전화든 몇 년만의 점심이든, 제 시간을 빼앗는 것에 대한 그 어떤 조바심을 수화기를 통해 또는 엽차를 마시며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
지난주도 그러했지요. 남편분과 아프리카 여행을 가려 한다는 부인을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도, 바쁜 사람 공연히 시간 뺐는 것 아니냐는 말을 몇 번씩 하셨습니다. 제가 부인에게 와인 한 잔을 사드리겠다고 했던 것은, 어쩌면 16년을 한결같이 저를 배려하는 그 격식에 대해 투정을 부리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와인바라는 곳은 처음 와봤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실 때만 해도 저는 부인의 입에서 파란 멍 자욱이 터져나오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저보다 조금 더 포도주를, 저보다 조금 더 빠르게 마시던 부인이 어느 즈음, 마치 바람에게 대화하듯 한마디를 툭 던지셨지요.
" 작년에 폐경을 했네요"
남자인 저로서는 폐경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초경이라는 것이 한 여인으로서의 탄생을 의미한다면 폐경은 그 반대가 아닐까라는 근거없는 생각, 그리고 언젠가 읽었던 김훈씨의 "언니의 폐경" 이라는 소설 속의 언니.
무생물에게서나 나올듯한 슬픈 표정을 하고는 폐경기의 언니는 창문 넘어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마치 조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 무기력의 슬픔에 감염돼 소설을 읽자마자 나도 꾸벅꾸벅 병든 닭의 졸음질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인도 언니처럼, 와인잔을 쓰다듬으며, 중력 잃은 언어로, 16년의 저쪽에서 이쪽으로 천천히 그러나 단숨에 건너오기 시작했습니다.
" 폐경까지 한 내가 이런 말을 꺼내면 요사스럽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아까 괌에서의 일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나는 그 모든 것이 기억납니다. 남편과 함께 한 여행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은 저에게 언제나 좋은 친구이고 동반자입니다.
그런데, 괌에서 스물일곱의 젊은 인솔자를 처음 봤을 때, 그리고 그 인솔자가 수영장에서 물놀이 시설 이용하는 것을 일행들에게 시범보여줄 때, 그때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남편에게는 느껴보지 못한 그 낯선 감정은 여행에서 돌아와 그 청년이 꿈에 나타날 정도로 강렬했었지요. 내가 대체 그 젊은이와 무얼 하겠다고 이러나 싶어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슴이 터질 것같아 가장 친한 친구에게 고백을 했고, 친구는, 그렇게 고민을 할 바에는 한 번 만나기나 해보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지요. 갑자기 나타난 이 생경한 감정은 죽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남편과 네 명의 아이에 대한 내 삶의 책임감은 엄연한 현실로 내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고 또 참고,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그 청년을 잊으려 애를 썼지요.
그 감정을 이제는 참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은 일 년이 지나서야 처음 전화를 한 것이었네요. 그리고 또 일년이 지나서 점심을 함께했고 그때마다 나는 , 행여나 내 주책 맞은 지난 감정이 들키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폐경을 겪고나니 모든 것이 담담해지고, 또 이런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을 만큼 편안해지기도 하네요. 앞으로 3년 후면 60이 될 테고, 이제는 스스로가 여자라는 생각도 들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추억이라도 갖게 해준 지난 시간과 스물일곱의 청년에게 고마울 뿐이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객석에 앉아 연극무대에 선 어느 배우의 대사를 듣는 듯한 아득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부인이 펼쳐놓은 지난 16년의 시간과 텅빈 과일같은 지금 부인의 모습에 적절하게 대꾸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짝사랑, 나이 차이, 불륜 따위의 통속적 단어는 물론 거기 없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슬픔 한 덩어리는 자꾸 목젖을 밀고 넘어오는데, 그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잘 모를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향한 대책 없는 분노, 그 시간앞에 이토록 무기력해지는 인간한계에 대한 비애, 부인이 겪었을 감정에의 안타까움, 그럼에도불구하고 자신이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을 굳건히 지킨 자에 대한 외경심 등이 혼합의 감정으로 섞여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슬펐고, 또 슬펐습니다.
와인 바를 나와서 회현동의 그 텅빈 지하도를 나란히 걸을 때, 저는 부인의 어깨를 잠시 어깨동무했습니다. 그것이 16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보낼 수 있는 부인에 대한 저의 유일한 신호였습니다. 부인은 어떠한 움츠림이나 놀람도 없이, 허허한 웃음으로 그 신호를 받으셨지요.택시를 잡아드리고 집으로 가는 길, 육체의 폐경과 사랑의 폐경은 다른 것이기를, 그리하여 여전히 많이 남은 부인의 삶이, 여전히 소녀이고, 여전히 누구에게라도 설레이기를 소망했습니다. 그것만이 이 비정한 시간에 농락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마땅히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인이라는 호칭은 부르는 저에게도 어색함으로 다가오지만 달리 부를 수있는 이름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나 부인이나 지난 16년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호칭을 생략했었습니다.
서로를 알아왔던 그 긴 세월에 비해 만남의 횟수는 고작 열 번도 채 되지 않았었기에 부르는 호칭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특별하게 불편함을 갖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화요일, 3년 만에 만나 저녁을 함께 한 자리에서 저는 부인과의 첫 만남이 1991년이었다는 것을, 그때 제 나이가 스물 일곱이었으며 부인의 나이가 마흔 한살이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알았습니다.
지나간 숫자를 꺼내놓는 부인은, 안개와 같은 망설임이라곤 조금도 없는 선명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어제의 일인 것과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랬지요. 스물일곱이면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지는 지금이지만, 분명히 그때 저는 갓 대학을 졸업한 여행인솔자로, 부인은 여행자로 16년의 처음을 시작했습니다. 괌이었었고, 열 대여섯명의 일행이 함께했고, 부인은 초로의 남편분과 함께 여행을 오셨었지요.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16년 전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 여행이 끝난 후, 부인은 1년에 한 번 정도씩 저에게 전화를 주셨었지요. 다음 여행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는 부인에게 저는 이런저런 여행을 추천했었고 여행을 다녀오신 부인은 저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도 하셨습니다. 대접이라는 말에 한없이 어색해하면서도 저는 부인과 2년에 한 번은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여행의 현장을 잠시 떠나있을 때에도, 부인은 해가 바뀌면 행하는 의식처럼 여행을 용건으로 전화를 주셨었지요. 그리고 드문드문 남편분의 정년퇴직이야기, 아이들의 대학진로이야기, 또 그 아이들의 취업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렇게 마흔 한 살의 부인은 시흔 일곱이 되셨고, 스물일곱의 청년은 마흔 세 살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만남의 횟수가 적다고 해도, 16년이라는 세월은 한참 손아래 동생뻘 되는 사람에게 조금은 스스럼없고 격의 없게 대할 수있으련만 부인은 그러지 않으셨지요.
언제나 제게 조심스러우셨고, 흐트러짐이 없으셨습니다. 또한, 전화든 몇 년만의 점심이든, 제 시간을 빼앗는 것에 대한 그 어떤 조바심을 수화기를 통해 또는 엽차를 마시며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
지난주도 그러했지요. 남편분과 아프리카 여행을 가려 한다는 부인을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도, 바쁜 사람 공연히 시간 뺐는 것 아니냐는 말을 몇 번씩 하셨습니다. 제가 부인에게 와인 한 잔을 사드리겠다고 했던 것은, 어쩌면 16년을 한결같이 저를 배려하는 그 격식에 대해 투정을 부리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와인바라는 곳은 처음 와봤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실 때만 해도 저는 부인의 입에서 파란 멍 자욱이 터져나오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저보다 조금 더 포도주를, 저보다 조금 더 빠르게 마시던 부인이 어느 즈음, 마치 바람에게 대화하듯 한마디를 툭 던지셨지요.
" 작년에 폐경을 했네요"
남자인 저로서는 폐경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초경이라는 것이 한 여인으로서의 탄생을 의미한다면 폐경은 그 반대가 아닐까라는 근거없는 생각, 그리고 언젠가 읽었던 김훈씨의 "언니의 폐경" 이라는 소설 속의 언니.
무생물에게서나 나올듯한 슬픈 표정을 하고는 폐경기의 언니는 창문 넘어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마치 조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 무기력의 슬픔에 감염돼 소설을 읽자마자 나도 꾸벅꾸벅 병든 닭의 졸음질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인도 언니처럼, 와인잔을 쓰다듬으며, 중력 잃은 언어로, 16년의 저쪽에서 이쪽으로 천천히 그러나 단숨에 건너오기 시작했습니다.
" 폐경까지 한 내가 이런 말을 꺼내면 요사스럽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아까 괌에서의 일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나는 그 모든 것이 기억납니다. 남편과 함께 한 여행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은 저에게 언제나 좋은 친구이고 동반자입니다.
그런데, 괌에서 스물일곱의 젊은 인솔자를 처음 봤을 때, 그리고 그 인솔자가 수영장에서 물놀이 시설 이용하는 것을 일행들에게 시범보여줄 때, 그때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남편에게는 느껴보지 못한 그 낯선 감정은 여행에서 돌아와 그 청년이 꿈에 나타날 정도로 강렬했었지요. 내가 대체 그 젊은이와 무얼 하겠다고 이러나 싶어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슴이 터질 것같아 가장 친한 친구에게 고백을 했고, 친구는, 그렇게 고민을 할 바에는 한 번 만나기나 해보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지요. 갑자기 나타난 이 생경한 감정은 죽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남편과 네 명의 아이에 대한 내 삶의 책임감은 엄연한 현실로 내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고 또 참고,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그 청년을 잊으려 애를 썼지요.
그 감정을 이제는 참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은 일 년이 지나서야 처음 전화를 한 것이었네요. 그리고 또 일년이 지나서 점심을 함께했고 그때마다 나는 , 행여나 내 주책 맞은 지난 감정이 들키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폐경을 겪고나니 모든 것이 담담해지고, 또 이런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을 만큼 편안해지기도 하네요. 앞으로 3년 후면 60이 될 테고, 이제는 스스로가 여자라는 생각도 들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추억이라도 갖게 해준 지난 시간과 스물일곱의 청년에게 고마울 뿐이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객석에 앉아 연극무대에 선 어느 배우의 대사를 듣는 듯한 아득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부인이 펼쳐놓은 지난 16년의 시간과 텅빈 과일같은 지금 부인의 모습에 적절하게 대꾸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짝사랑, 나이 차이, 불륜 따위의 통속적 단어는 물론 거기 없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슬픔 한 덩어리는 자꾸 목젖을 밀고 넘어오는데, 그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잘 모를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향한 대책 없는 분노, 그 시간앞에 이토록 무기력해지는 인간한계에 대한 비애, 부인이 겪었을 감정에의 안타까움, 그럼에도불구하고 자신이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을 굳건히 지킨 자에 대한 외경심 등이 혼합의 감정으로 섞여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슬펐고, 또 슬펐습니다.
와인 바를 나와서 회현동의 그 텅빈 지하도를 나란히 걸을 때, 저는 부인의 어깨를 잠시 어깨동무했습니다. 그것이 16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보낼 수 있는 부인에 대한 저의 유일한 신호였습니다. 부인은 어떠한 움츠림이나 놀람도 없이, 허허한 웃음으로 그 신호를 받으셨지요.택시를 잡아드리고 집으로 가는 길, 육체의 폐경과 사랑의 폐경은 다른 것이기를, 그리하여 여전히 많이 남은 부인의 삶이, 여전히 소녀이고, 여전히 누구에게라도 설레이기를 소망했습니다. 그것만이 이 비정한 시간에 농락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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