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푸른 숲을 향한 <가을로>의 노정
2007. 8. 19. 02:47ㆍ사소한 이야기들/영화
#1 포항 내연산 : 사랑, 그 흔적을 찾아서 “지금 우리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는 마음속에 나무숲이 가득할 것이다.” 이미 내연산 초입에는 4월을 물들였던 벚꽃이 고개를 떨궜다. 붉게 마른 꽃잎이 오랜 추억인 양 길가를 뒹군다. 시간이 지나면 바람이 흔적도 없이 데려가리라. 연인의 죽음처럼. 꽃이 떨어진 가지에는 신록의 잎들이 푸른빛을 발한다. 좁은 아스팔트를 따라 손을 맞잡고는 하늘마저 가린다. 새로운 생명처럼. 이 길 위에서 현우는 사랑을 잃고 사랑을 찾을 것이다. 보령사를 끼고 산길을 오른다. 쌍생폭포를 시작으로 12개의 폭포는 지난 사랑을 곱씹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위용이 빼어나다는 학소대의 7번째 관음폭포와 8번째 연산폭포도 어찌할 수 없다. 물길과 산길은 서로를 옭아매듯 헤집고 흐른다. 간신히 하늘을 가린 바위 틈 아래는 다정한 연인이 지친 다리를 쉬어 간다. 빗소리를 들으며 입맞춤하던 현우와 민주의 다정한 한때다. 햇볕이 쨍한 봄날에도 계곡의 거친 물소리는 지난 시간의 애잔한 상념을 불러낸다. 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이제 그만 제 손을 놓아도 좋다는 민주의 속삭임이다. 먼발치 현우의 뒷모습이 처연하다. #2 7번 국도 : 당신의 이름을 되뇌인다 “사실 바다와 소나무가 있어 국도 7호선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저런 어촌마을 그 안에 저렇게 사람 사는 모습이 있어서 이 길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내연산을 나와 불영사로 향하는 길은 울진까지 이어지는 국도 7호선이다. 길을 사이에 두고 산과 바다다. 민주가 말하던 푸른 숲이 이곳일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다. 오징어나 미역을 말리고 그물을 손질하는 주름진 손끝은 분주하다. 남겨진 자는 어쩔 수 없이 삶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에 마음이 울렁인다. 민주처럼, 현우처럼 ‘병곡, 후포, 평해, 월송, 덕산’ 하고 지나는 마을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하지만 수많은 연인의 자취가 새겨진 국도 7호선은 세월에 무심하다. 아니 무심한 척한다. 진달래 고운 길가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릴 수 없는 내 님의 그림자가 짙다. 월송정의 해돋이는 현우에게 그 음울함은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었을까. 관동팔경의 제일 남단이라는 월송정에서 이른 아침 해를 맞는다. 나지막한 언덕 아래로는 해송이 넘실댄다. 현우는 말이 없다. 눈에는 붉은 햇살이 가득하다. 울컥하고 가슴을 울리는 것은 또 무엇일까. 고운 추억이 어린 바닷가에는 성긴 마음이 서성인다. 민주의 여행 수첩은 울진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숨을 고른다. 곧장 내달리면 동해를 타고 강릉과 속초까지 이어지리라. 푸른 바다를 낀 질주의 쾌감이다. 하지만 민주는 국도 36호선을 따라 불영사로 접어든다. 이름에 깃든 그림자(影)라는 의미 때문이었을까. 뒤를 잇는 건 민주의 환영인 세진이다. 그리고 민주를 그리는 현우다. 불영계곡의 자연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왔다. 영원불멸의 기원, 그것은 마치 현우가 정의 내린 사랑의 의미 같다. 기암과 괴석이 부딪쳐 만들어 낸 자연의 경이로움은 계곡의 물길을 낚아챈다. 숲의 사이로는 봄 나비들의 고운 날갯짓이다. 10분이면 족히 보고 돌아설 길가에서 1시간을 머뭇거린다. 현우의 여행도 이처럼 길에서 푸른빛을 찾아 떠돌았으리라. 굼뜬 사랑도 애벌레처럼 몸을 뒤튼다. 산 위에서 불영의 계곡을 향해 바람이 분다. 또 한 번 소리 없는 민주의 음성이다. #3 울진 불영사 : 영혼의 그림자 천축산이 둘러앉은 그루터기, 불영사는 화사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풀 하나 나무 하나, 심지어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정성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불영사에 이르러서야 현우와 세진은 온전한 인사를 건넨다. 일주문으로 들어서 그들의 뒤를 쫓는다. 그들의 가을에는 존재하지 않던 벚꽃이며 진달래가 얼굴빛을 붉힌다. 계곡의 물길도 이어진다. 절벽 위로는 노송이 가지를 풀어헤쳤다. 위태하기보다 도도하다. 불영사로 가는 길은 꽤나 멀다. 대웅전까지 30분쯤 걸어가야 한다. 불영사는 그 이름이 말해 주듯 절터 한가운데 있는 연못이 그윽한 멋을 풍긴다. 서쪽 산 위에 바위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면, 부처님의 형상을 닮았다 한다. 그래서 부처님 불(佛)자에 비칠 영(影)자다. 불영지(佛影池)에 비치는 것은 비단 부처님의 상을 한 바위만이 아니다. 불영사를 찾은 모든 이들은 연못에 제 그림자를 비춰 본다. 그 고요한 물길은 마치 천 길이나 되는 듯하다. 마음의 깊이도 그러할까. 미동에도 요동치는 물그림자는 연약한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 모습이 진실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여, 비로소 제 가치를 되찾는 듯하다. 뒤늦게까지 꽃을 피운 자목련도 반갑다. 민주의 환영이 현우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 같다. #4 평창 월정사 : 다시 찾은 푸른 숲 “우리가 도착한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숲을 만나게 될까. 여행에 끝에서 나는 생각해. 너를 만나서 내가 커졌고, 너 때문에 매일 새로워지고 널 보면 난 힘이나. 내 마음속에 생긴 숲은 바로 너였나 봐.” 아우라지를 지나 월정사로 이어지는 길은 푸르다. 동강의 물길은 깊고 그윽하여 그 빛깔로도 말을 걸어 온다. 짧은 한숨처럼 여행의 마지막 쉼표를 찍던 현우의 표정이 떠오른다. 실상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비옥하게 살이 찐 풍경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마치 지난 세월이 그렇게 흘러와 버렸다는 듯이. 여행의 종착역인 월정사의 전나무 숲은 현우가 도달한 마음의 숲이다. 민주는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로 월정사의 전나무 숲을 꼽았던가. 하늘을 향해 끝 간 데 없이 치솟은 나무의 행렬에 마음은 자연스레 짐을 내려놓는다. 사막 같은 현우의 마음에게 푸른 숲을 선물하겠다는 민주의 증표가, 전나무 가지에 노란 손수건처럼 걸려 있다. 민주의 생명을 이어받은 세진의 마음도 한결 홀가분하다. 그리고 방점을 찍듯 상처를 벗은 마음을 확인하는 일, 민주를 떠나보내며 현우와 세진은 설분 눈물을 흘린다. 새벽 사찰의 풍경 소리가 들린다. 여명이 바람의 잠을 깨운 탓일까. 이제 사랑이 무언지 조금은 알 듯도 하다. 그 여정은 현우와 세진, 그리고 민주에게는 어떤 의미의 숲이었을까. 5월의 거침없는 녹음은, 조심스레 가을빛이 남긴 사랑의 그림자를 지워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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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3 13:14 입력 / 2007.05.23 13:15 수정 |
출처 : 생태소나무
글쓴이 : 생태소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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