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7. 14:55ㆍpharm/데일리팜
캘리포니아 약사면허를 처음 받고 약사가 일하는 컴퓨터 스테이션 앞에 섰던 그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인턴 시절, 멋모르고 보이는대로 처방전 입력하고 약사의 지도 아래 상담하던 시절에는 그냥 얼른 약사가 되서 일하기 가장 힘들고 짜증나는 드라이브-쓰루 (Drive-thru)를 벗어나겠다는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약사 면허를 받고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약사 컴퓨터 스크린이 내 앞에 뜨니 클릭을 할 때마다 각종 팝업 윈도우가 뜨면서 약을 내보낼 것인지 안 내보낼 것인지, 상담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물어보는데 하나하나 클릭할 때마다 얼마나 걱정되고 가슴이 떨렸던지. 인턴 시절은 몸이 힘들었다면 갓 면허를 땄던 그 시절에는 하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클릭클릭한지라 집에 오면 긴장 풀어지면서 곤두섰던 신경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미국 약사는 한국 약사와 무엇이 다른가. 약대 교육의 질이 높고 일정 시간의 병원과 약국 인턴십을 마쳐야 약사가 되기 때문에 약사의 의견이 정말 약의 전문가로서 존중받아 다른가. 그래서 의사가 약물상호작용은 약사에게 상담하라고 환자를 약사에게 보내는걸까. 약물상호작용으로 병용금기이니 약 바꾸라고 하면 순순히 바꾸는걸까.
물론 일부분은 맞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미국은 소송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처음 약사 스테이션에 나의 이니셜을 찍고 로그인했을 때 나의 프리셉터 (Preceptor, 인턴 지도약사)가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난다. (얼마 전 신참 약사 트레이닝하면서 나도 같은 말을 했다.)
"처방을 내 보낼 때는 너의 면허를 보호하고 소송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해야한다. 바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큰 일을 당할 수가 있다. 그리고 만약의 소송을 대비해 약사보험에 가입해라."
만약 병용금기인 약이 처방되는 경우 의사에게 그 사실을 지적하고 의사가 그래도 처방하겠다고 한다면 그 경우 책임은 의사에게로 모두 넘어간다. 하지만 약사가 지적하지 않았다면 약사의 책임이 절반이다.
의사에게 병용금기나 약물상호작용 문제로 전화하는 경우 90% 이상은 약사의 의견대로 약을 바꾼다. 특히 응급실 의사나 미국에서 약을 처방할 수 있는 피지션 어시스턴트(Physician Assistant)나 널스 프랙티셔너 (Nurse Practitioner)는 약사가 환자 프로파일을 보고 약을 바꾸라고 전화하면 100% 바꾼다. 이유는 간단하다. 약사가 지적했는데도 바빠서 그냥 넘어갔다거나 의사의 자존심 때문에 억지 주장을 폈다가는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모두 책임을 져야되기 때문이다.
약사의 하루는 선택의 하루다. 의사한테 전화를 할까 말까, 특정 부작용을 환자에게 언급하는 것이 나은가 아닌가, 이 약을 오늘 내 보낼까 말까.
미국 약사일기를 한번 기획해보라고 데일리팜으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일년이 지난 지금에야 프롤로그를 쓴다. 작년 데일리팜 측에서 이런 격려를 했던 기억이 난다. 고료로 소득을 올린다고 생각보다는 한국의 약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글을 남긴다고 생각하시라고.
데일리팜에 올리는 나의 약사일기가 한국의 보건의료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면서 이제 미국약사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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